J8M 슈스이


태평양 전쟁 중 일본 제국이 루프트바페의 Me163 코메트의 자료를 기초로 개발하려했던 로켓추진전투기로, 기체는 해군, 엔진은 육군이 담당했으며 연구개발은 공동으로 행해졌습니다. 정식명칭은 19시(試) 국지전투기 슈스이입니다. 시험비행이 끝나고 육해군 관계자가 모여 연회를 벌이다가 Me163이 아닌 일본식 이름을 짓자는 말이 나왔는데, 이 때 평소 하이쿠에 재능이 있던 오카노 카츠토시(岡野勝敏) 해군소위가 '날카로운 검(秋水) 3척으로 이슬을 베어낸다.'는 시를 읊자 만장일치로 슈스이(秋水)라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해군의 기종번호는 J8M, 육군의 기종번호는 Ki-200입니다.


1945년 7월 7일 해군 요코스카 항공대 비행장에서 슈스이의 첫 시험비행을 가지게 됩니다. 본래는 4월 12일 시험비행을 검토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연기되었습니다. 제312 항공대의 공정대 분대장인 히로세 유키지 대위와 그 부하들이 정비를 마치고 오후 4시 55분 시험비행을 합니다. 본래 오후 2시에 시험 비행을 하려 했으나 엔진 재정비 하느라 늦어진 것인데요. 시험 비행의 비행사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누즈카 대위였습니다.
처음에는 시험비행에 성공했다고 여겨져 제312 항공대장 야마시타 다테오 비행장이 성공을 뜻하는 흰 깃발을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꼬리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일더니 펑펑펑 소리와 함께 엔진이 꺼져 버렸습니다. 이누즈카 대위는 엔진을 재가동하고 연료의 비상투입을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고 슈스이는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누즈카 대위는 활주로 옆의 황무지로 불시착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우측날개가 감시탑과 부딪혀 기체가 대파하고, 이누즈카 대위는 다음날 두개골 골절로 사망합니다.
사고 원인은 연료탱크 상의 구조적인 문제로 급상승시 연료가 제대로 분출되지 않았는데 여기에 연료를 1/3밖에 싣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점화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시제 2호기는 엔진 폭발로 중단되었으며 육군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하던 시제기는 탑재할 엔진이 없어서 지바현 가시와 비행장에서 시험 비행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종전을 맞이합니다. 시제 3호기 역시 엔진이 없어서 역시 시험비행을 하지 못합니다. 애초에 원본인 코메트조차도 결함이 있어 써먹기 힘들었는데 부족한 기술력으로 복제한 슈스이가 제대로 될리가 없었습니다.
일본군은 슈스이를 히타치를 비롯한 5개 공장에서 양산하려 했으며 1945년 3월 155기를 시작으로 1946년 3월에 3,600기를 실전배치하기로 계획했으나 당시 폭격에 의해 파괴되던 일본의 공업력을 생각해보면 허황된 계획이었습니다.

Posted by 헬프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