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11
소련 최후의 레시프로 전투기로 실전 배치된 소련의 모든 레시프로 단발단좌 전투기 중에 가장 뛰어난 성능을 가진 기체였습니다. 나토 코드명은 팽(Fang, 송곳니)입니다.
각종 시험을 통과한 시제기는 La-11이란 명칭으로 제식 채용될 것이라고 결정되었습니다. 생산은 힘키(Химки)의 제21공장(21-й завод)에서 이루어지도록 계획이 잡혔습니다. 첫 해에는 백 대가 만들어지는데 그쳤으나 이듬해에는 650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후 La-11의 생산은 일단 중단되고, 1949년부터 양산이 재개되어 150대가 더 완성되었습니다. 마지막 해인 1951년에는 182대가 생산되어 La-11은 모두 1182대가 만들어진 셈입니다.
1948년에 La-11은 대전 중에 개발된 투폴레프 Tu-2 쌍발 폭격기의 개량형인 Tu-6 정찰기가 선도기를 맡아 북극 상공까지 비행 테스트를 시도했습니다. 이 실험은 급격한 온도 변화 시 내구성을 입증하기 위한 예심이었습니다. 1951년 여름에 제81공장에서는 La-11에 ARO-82(АРО-82) 로켓 모터를 추가시키는 개조 작업이 실시되었으며, 또 다른 1대는 과급기가 고도에 따라 자동으로 작동되는 절환기를 추가하고 시험을 받았습니다.
La-11은 사진 정찰기 형식도 개발되어 1950년 7월에 공장 시험을 통과하자 9월 22일에는 국가 시험이 실시됩니다. 이 기체는 촬영할 때 동체 밖으로 튀어나오고 필요없을 때는 접혀 들어가는 AFA-BA-40(АФА-БА-40) 인입식 항공 카메라가 설치되었습니다. 그 해에 공군의 요청에 따라 전투기형 100대가 정찰기 사양으로 개조되었급니다. 무장을 그대로 남긴 채 카메라가 추가된 단좌 정찰기 형식은 중량이 늘어나 엔진 출력이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1951년에는 1,850마력 ASh-82FN(АШ-82ФН) 엔진을 2,000마력까지 향상시키는 개량 작업이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간단한 개량만으로는 무리가 따르고 엔진 자체를 바꿔야만 할 것이 분명해졌고, 곧 취소되었습니다.
그러고 있는 동안 출력이 1,900마력으로 증강된 ASh-82T 엔진이 일류신 Il-14 여객기를 위해 개발되었는데, 이것이 이 엔진의 한계였습니다. 1950년에는 150대의 La-11에 계기비행을 도와줄 RV-2(РВ-2) 전파고도계와 MRP-48(МРП-48) 비콘 수신기, 그리고 ARK-5(АРК-5) 자동 무선나침반을 장착하는 개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생산 기체가 이 사양으로 개수된 것은 아니며, 개조 작업을 하지 않고 공장 비행장에 방치된 기체도 종종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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