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A


일본의 항공기 제작사인 아이치 항공기(愛知航空機)에서 1936년에 발표한 복엽 수상관측기로, 일본 해군 채용에 도전했으나 탈락했습니다.
10식수상관측기(十試水上観測機)란, 한 가지 기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934년에 일본 해군이 요구한 후보 기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일단, 이 사업에서 승리한 미츠비시는 1940년에 F1M 영식 수상관측기로 제식 채용되었으나, 사내 명칭 AB-13으로 불린 아이치 사가 제작한 시제기는 경합에서 탈락했습니다.
F1A는 순수하게 성능만으로 비교하면 미츠비시 후보기를 능가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기체 구조가 당시 해군이 원하던 의도에 맞지 않아 선택되지 못했다는 주장이 타당해 보입니다. 해군은 1935년 3월에, 단거리 정찰과 감시, 관측 등을 주임무로 삼으면서도 전투기와도 맞설만한 뛰어난 공중전 능력을 가진 복좌 수상정찰기의 소요를 10식수상관측기라는 명칭으로 아이치와 미츠비시, 가와니시(川西航空機) 사를 지명해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가와니시는 대형 비행정인 H6K의 설계와 개발에 쫓기고 있어 이 사업에는 미츠비시와 아이치만 응하게 됩니다.


해군 항공본부의 주관으로 실시된 미츠비시와 아이치 양사의 심사 결과는 어느 쪽이 앞선다고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엇비슷했습니다. 공중전 성능은 미츠비시 쪽이 다소 나았으나 속도 성능에서는 아이치 쪽이 25 km/h 이상 앞지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심사는 원래 예상했던 스케쥴보다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이치 F1A는 날개 구조가 나무(물론 수상기이기 때문에 방수에는 문제가 없었으나)여서 습기에 약해 부식이 빨리 되고 구조가 쉽게 변형될 것에 불안을 느낀 해군 항공본부는 주재료로 경금속을 쓴 미츠비시 쪽에 기울게 됩니다.
게다가 시험이 길어지는 동안 미츠비시 기술진들이 엔진을 더 강력한 즈이세이(瑞星一三型)로 바꾸고 기체 곳곳을 몇 군데나 수정하는 등 총력을 다해 개량을 거듭하자 F1M은 운동성과 속도 모두 크게 향상되어 아이치의 후보 F1A의 성능을 전반적으로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해군은 미츠비시의 손을 들어 주었고 아이치 F1A는 그대로 탈락했습니다.

Posted by 헬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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